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폰 파펜 (문단 편집) === 이후 === [[제2차 세계대전]] 당시에는 주 [[튀르키예]] 대사로 부임하여 [[중립국]] 튀르키예를 추축국으로 꼬드기는 작업에 전념하였고 실제로 [[1941년]]엔 독일 - 튀르키예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. 그러나 [[튀르키예]]는 여전히 중립적이었고[* 튀르키예의 국부인 [[아타튀르크]]가 죽기 전에 히틀러는 미친놈이니 절대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당시 [[튀르키예 대통령]] [[이스메트 이뇌뉘]]는 [[2차대전]] 후반까지 중립을 고수했고 이후 전황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연합국 쪽에 합류했다.] [[소련]]의 스파이에 의한 암살미수 사건까지 접한 파펜은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 전에는 첩보원을 시켜 영국대사관의 정보를 수집했지만 오히려 [[연합국]]의 기만전술에 걸려 독일에 잘못된 정보를 보내는 사고를 터뜨리기도 했다. 결국 [[1944년]]에 [[튀르키예]]가 [[나치 독일]]과의 [[단교|외교관계를 단절]]하면서 독일로 귀국했다. 그 뒤 [[로마]] [[교황청]]의 대사가 되는 방법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베를린 교구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고, [[1944년]] 7월에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이 일어나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던 파펜은 오히려 [[게슈타포]]의 감시만 받게 되었다. 파펜은 자신의 사위인 막스 폰 슈토크하우젠 백작이 메센디에 소유한 성에서 살다가, [[1945년]] 4월에 [[미군]]이 메센디를 점령하자 인근의 사냥꾼 가옥으로 달아났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. 파펜은 [[헤르만 괴링]], [[카를 되니츠]], [[알베르트 슈페어]], [[빌헬름 카이텔]] 등과 함께 [[나치]] [[전범]]들 중에서도 거물급의 [[포로]]가 수용되어 있던 [[룩셈부르크]]의 바트 몽들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.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에서 파펜은 나치 정권에서 공직생활을 한 점과 [[오스트리아 합병]]에 관여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. 파펜 자신은 [[1946년]] [[6월 14일]] 변론에서 히틀러에 협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했고, 히틀러에게 실질적으로 사임을 당한 전 정권인사는 자기뿐이었다고 항변을 했다. 그러자 [[영국]] 측 수석검사인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은 이에 대해 "그렇소, 그리고 당신은 11일 후 [[안슐루스|오스트리아를 살해]]한 [[나치 독일|정부]]의 대사가 되었지." 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. 결국 [[1946년]] [[10월 1일]] 파펜은 히틀러를 총리에 앉힌 동조죄와 히틀러 정권에서 대사를 지낸 고위직 인사이며, [[오스트리아 합병]]에 관여한 죄로 [[기소]]되었지만 범죄행위가 없다는 점에서 [[무죄]]가 확정되었다. 이에 [[소련]] 측 재판관인 이오나 니키첸코는 히틀러의 범죄행위 대부분은 파펜이 가담했다고 하면서 [[유죄]]를 요구했지만 서방 측 재판관들은 이를 거부했다. 또한 프란츠 폰 파펜은 [[1947년]] 2월에 열린 비나치전범 재판에서 노동교화 8년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지만 결국 [[1949년]]에 [[무혐의]]로 풀려났다. [[1952년]]에는 자신의 회상록인 <길 위의 현실(Der Wahrheit eine Gasse)>을 출판하였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"'''히틀러가 집권한 건 내 탓 아니다!'''"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았다. 이에 [[역사학자]] 로버트 위스트리치(Robert Solomon Wistrich)는 "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내용"이라며 비판했다. [[1959년]] [[7월 24일]]에는 [[교황]] [[요한 23세]]와 미국 주재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교황시종으로 임명되기도 했고, [[몰타 기사단]]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. [[서독]] 정계에 진출하려고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. 파펜은 은거생활을 보내던 [[바덴뷔르템베르크]]주의 오버자스바흐에서 [[1969년]]에 사망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나고도 24년을 더 살다가 89살 장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. 그가 죽은 해 세계는 [[68혁명]]의 후유증으로 들끓고 있었고, [[독일]]에선 그 해 10월에 [[빌리 브란트]]가 총리가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